그들의 가족을 위해 기도했던 그의 증조부모의 기도에 함께 동의합시다!

9월 6일,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백만의 교회에 함께 해주세요.



Silhouette of christian prayers raising hand while praying to the GOD with three cross symbols

독실한기독교인이었던김정은의증조부모(유대영저)


저자 유대영 (서울대학교 학사,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신학대학원, Harvard University 석사, Vanderbilt University 박사)은 한국의 한동대학교에서 역사과 종교학 교수로 전임하고 있다. 그는 A History of Protestantism in Korea (한국의 개신교 역사, 2018)와 Missionaries and Imperial Cult: Politics of the Shinto Shrine Rites Controversy in Colonial Korea, Diplomatic History (선교사와 제국적 이단: 식민 한국 속에서의 신도숭배의식의 정치, 외교 역사, 2016년 9월)를 저술했다. 그의 글들은 외교사, 교회사, Journal of Church and State (교회와 국가 신문), 신학 오늘, 한국 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특별한 관심사는 한국 기독교 역사와, 미국 종교사, 역사와 문학에 있다. 이 글은 그의 6번째 책인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2009)에서 시작됐다.

서론

한 개인이 한 나라의 최고 지배자일 때에는, 그 사람의 경험과 가치관이 국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일들이 북한이라고 알려진 조선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과 함께 행해졌다 (1912-1994). 한 국가의 창시자로써, 김일성과 그의 가족은 북한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 정책, 종교에 대한 인식 그리고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한 태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놀랍게도, 김일성의 기독교에 대한 시선은 일반적인 공산주의 지도자와는 달랐으며 기독교와의 그의 관계에는 미묘한 것들이 존재했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이었으며 그 또한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며 그의 삶 전반에 걸쳐 많은 기독교인들의 도움과 지지를 받았다. 그는 “애국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을 찬양하고 지지했다. 더 나아가 그는 절대로 기독교인들을 그 자체로 비난하지 않았다.

아래의 내용들을 통해 김일성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북한의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그의 공식 선언들이나 그의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를 검토하고 분석할 것이다. 그의 아들인 김정일과 북한 학자들의 업적을 포함한 다른 관련 자료들 또한 참고할 예정이다.

유년시절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그는 “내가 어릴 때엔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자랐다.”라고 저술했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인이었으며, 가까운 친척들과 초등학교 친구들, 이웃들 또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어머니인 강반석은 평양 근처의 칠골에서 유명한 장로교 집안 사람이었다. 강반석의 아버지인 강돈욱은 김일성이 기독교 교육을 받았던 기독학교인 강덕학교의 설립자였으며 영향력 있는 장로 중 한 명이었다. 후에 북한의 부수령이 된 강량욱은 강돈욱의 사촌이었고, 김일성을 학교에서 가르쳤다. 강량욱은 장로교 전도사로 안수 받았으나, 그 또한 북한의 설립 과정에서 김일성을 도왔다. 김일성은 그의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했다.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은 미국 “북”장로선교회에서 한국 기독교 리더를 세우기 위해 파송 받은 근본주의 선교사로부터 세워진 전통 기독교학교인 숭실학당을 다녔다. 김일성의 아버지가 기독 학교를 나갔기에 김일성은 “내 주변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자주 왕래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의 부모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그의 아버지가 무신론자라고 주장했다. 북한에 대한 연구들은 김형직이 선교사들의 성경교육과 학생을 존중하지 않는 행정절차에 반하여 숭실학당을 그만 두었다고 이야기한다. 김일성 또한 그의 회고록에서 그의 어머니가 “매주 교회에는 나갔지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어린 김일성이 그의 어머니에게 왜 교회를 가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쉬러 간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한다.

명백하게도 그의 부모의 신앙에 대한 김일성의 부인은 조심스럽게 구성된 정치적 발언일 것이다. 만약 공식적으로 그것을 인정했다면 최고 수령으로서 그에게 복잡한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성향은 그의 가족의 혁명적인 전통에서 강조가 되며 실제로 그의 부모는 반-외세혁명으로 묘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부모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부정은 찾아볼 수 없다.

한 증언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주로 참석한다는 새벽기도를 거의 거르지 않는 “좋은 기독교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숭실학당 동료들인 배민수, 노덕선과 함께 애국주의 조선국민호(조선인 연합)를 만든 애국주의 기독교인이었다. 그들은 비밀 반일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신실하게 기도하는 기독교인이었으며 그 노력의 중심에선 교회들과 독립 운동을 함께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지 않았다면, 기독교 신앙과 가치관이 명확한 숭실학당에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의 유년시절 이후 기독교적 정체성의 발달에 대해선 잘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김일성이 그의 아버지가 반일 저항 활동을 하다가 병에 걸려있던 만주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동상으로 요절한 이후, 그는 질린으로 이사해 1927년부터 1929년까지 Yuwen 중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시절에, 그는 한국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 목사인 손정도는 독립 운동가였으며 그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목사의 가족은 아버지를 잃은 김일성을 따뜻하게 보살폈다. 김일성은 후에 그가 손정도를 “깊은 신앙을 가진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가 자신의 아버지인 것처럼 존경하고 따랐다.”고 저술했다. 김일성이 그의 회고록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는 손정도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 그는 또한 교회 예배당에서 청년 모임을 주도하여 열었다. 1929년도에 학생시위에 연루되어 그가 감옥에 갔을 때에도 손정도는 몇 달 동안 사설품을 보내주고 풀려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김일성은 계속해서 손정도의 아내가 자신을 “넘치도록” 사랑해준 것에 감사했으며 손정도를 “내 삶의 구원자”라고 칭했다.

젊은 김일성은 많은 애국주의 기독교인들을 만났다. 그는 손정도같이 자신의 삶을 조국의 독립과 헌신하고, 그들이 기도할 때마다 “한국을 위한 기도”를 떠올렸던 기독교인들을 기억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종종 “네가 천국에 대해 믿으려고 한다면 한국의 천국을 믿어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것은 김일성의 유명한 격언인 “당신이 신을 믿고자 한다면, 한국의 신을 믿어라.”라고 하는 그의 종교에 있어서 대표적인 선언의 기원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시대 아래 있었던 애국주의 기독교인들의 “순수한 믿음”을 찬양했으며, 한국의 독립을 통한 “천국을 이룩하려는 그들의 소망”을 기억하고자 노력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회고록에서도 그들이 한국의 독립을 얻고자 노력했다는 식의 “애국주의” 기독교인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은 그의 아버지의 친구들과 민족주의 지도자들인 김구와 안창호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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